주이상스 jouissance 를 위한 응시
 
이진실 미학/미술비평
 
 
 
그림은 세계를 낯설게 보도록 한다. 뒤집어 말하자면, 익숙한 세계를 낯설게 보도록 하지 않는 그림이란 없다. 마치 현실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메타 리얼리즘 회화나 세밀화라 하더라도 그것이 캔버스 위의 그림인 한, 현실의한 토막을 더욱 생경하게 만든다. 그래서 화가의 눈은 본디 낯섦의 시선이며, 은폐된 채 매끈하게 보이는 현실의 이음새들에서 틈을 발견하는 시선일지 모르겠다. 일상의 사물들을 캔버스 위에서 탐색하는 이은경의 시선이 낯설고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일차적으로 미시적, 혹은 현미경적인 응시 때문이다. 그의 평면작업에서는 풍경의 파노라마나 대담한 스케일의 공간은커녕 인물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사물들의 소우주, 마이크로 코스모스를 항해하는 듯 작은 사물들의 모습을 희고 커다란 캔버스에 담아낸다. 그러나 그 그림들은 사물의 형태를 두고 시각적 경험과 실재간의 간극을 탐색한다거나 그 사물을 신랄하게 혹은 경이롭게 재현하는 데 주목한 결과물이 아니라, 그저 무심코 던진 시선이 사물과 만나는 접점을 그대로 떠 낸 그 어떤 일별의 순간, 정지의 순간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그림들은 순간을 포착한 사진처럼 느껴지는데 그것도 선명한 사진이 아니라, 노출이 어긋난 사진 혹은 감광판 위에 놓인 포토그램의 B컷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이 그림들의 중심에 사실적 재현이나 작가가 부여하는 프레임이 아니라 생략, 사라짐, 부재가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바로 그의 회화가 던지는 낯섦의 두 번째 지점이다.

 

콘트라스트의 과잉 over contrast

이은경의 그림이 정밀화가 아니지만 사진과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이런 이유에서일까? 특히 이번 작업들은 언뜻 보면 일상적 사물들을 찍어서 콘트라스트를 끝까지 끌어올린 한 장의 사진 같다. 빛의 과잉으로 사물표면의 광택, 혹은 투명한 유리의 형상은 배경과의 경계가 사라진 채 푹 꺼져버린다. 또 빛은 사물의 형상으로 침투해 들어가 사물의 형태를 깎아내고 갉아먹기도 한다. 이렇듯 사물의 형태를 볼 수 있는 시각적 가능성의 전제 조건이면서 우리를
눈멀게도 하는 이 빛으로 인해 사물의 형상은 잠식당한다. 이 빛이 극도로 팽창된 무대 위에서 사물들의 일부는 정밀하게 드러나고, 또 다른 일부는 희미하게 소멸된다. 이렇게 노출 강도가 높은 사진마냥 사물의 형태가 정지의 모습으로 유예되어 있는 대신, 사물들 안에 일련의 리듬처럼 나타나는 모티프들은 변주를 일으키며 여백의 공간으로 흘러넘친다. 양말의 땡땡이 무늬, 쿠킹포일 은박지의 반짝임, 컵 위에 새겨진 그물망과 물고기처럼 모티프들의 역동적인 리듬은 이 정지의 순간에서 유일하게 살아 움직이는 요소들로 해체되어 제 생명력을 얻은 듯하다.

 

투명함, 그리고 경계의 사라짐

작가는 이러한 형상의 재구성을 ‘정제’라고 표현했다. 매 작업마다 무엇을 걸러내고 무엇을 결정체로 붙잡는가 하는 문제는 그에게 유희이자 끈질기게 거듭되는 분투가 된다. 이은경의 작업에서 하나의 지속적인 맥락이 있다면 그것은 ‘유리’라는 물질성과 그 질료가 불러일으키는 시각적 동요일 것이다. 2012년 <Something is Missing>에서 선보인 정물 작업들은 유리컵이나 유리병에 담긴 꽃, 과일, 리본과 같은 사물들의 그림이었다. 캔버스 위에서 일렁이는 유리의 반사광, 아주 생략된 유리의 형상,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아련하게 투과된 과일의 양감은 네덜란드 화가들의 알레고리 가득한 정물과는 전혀 다른 명랑함과 실험성을 노출했다. 2014년 <Fragile>에서는 에그템페라와 수제 젯소라는 아주 오래되고도 ‘유약한’ 재료를 통해 현대적인 상업적 이미지와 패턴들을 원형캔버스 안에 그려놓고 그것들의 균열,

훼손의 과정을 ‘쿨하게’ 제시하기도 했다. 작가는 깨지기 쉬움, 투명함과 같은 유리의 물성을 일렁거리는 빛, 형상의 왜곡, 이미지의 연약함 등 다각도의 회화적 실험으로 분화시켜 본 것이다. 이번 작업에서도 작가가 ‘정제’시키고자 하는 형상의 출발점은 유리라는 물성과 무관하지 않다. 투명함, 또는 백광(白光)을 흰 배경의 캔버스 위에 표현한다는 것은

배경과 형상의 경계, 사물과 부재의 경계를 실험하는 일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간의 작업을 통해 이러한 시각적 경계를 극사실적으로 표현해 내고픈 욕망이-그러할 수 있는 역량 또한- 고조되었을 지금, 작가는 오히려 금욕주의 사제의 가학과 같은 태도로 이러한 경계를 무화시키거나 단순한 선형과 색채로 대체시키고 있다. 사물과 부재의 경계, 있음과 없음의 경계는 이제 일렁이는 빛의 환영과 형태의 왜곡을 낳는 유리의 투과성에서 텅 빈 배경, 아니면 노골적인 2차원 색 덩어리라는 양극단으로 환원되면서 완전히 미스테리한 형상으로 전복된다. 투명한 매체라는 시각적 환영을 되살려내고픈 욕망을 형체 없음, 사라짐이라는 순수한 투과성으로 해체시키며 새로운 형상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빗나가는 응시

이 미스테리한 형상의 원형을 추론해보는 일이나, 사물의 형상을 미스테리한 형상으로 재구성하는 일은 마치 매직아이처럼 주변적 시야나 색맹지대를 소환하고, 뚜렷한 망막의 소실점을 놓아버리는 일이다. 다시 말해, 견고한 형상을 포기하고 흩어져 떠도는 미지의 형상들을 포착해야 하는 일련의 일탈이다. 그것은 상징 질서라고 일컫는 일련의 통상적 ‘보기’와는 다른 ‘응시’의 전략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인간은 누구나 언어를 배우며 소위 상징 질서에 편입한다(라캉). 이 상징 질서로의 진입은 주이상스(자기 쾌락)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말’(기존 수립되어 있는 질서체계)을 따르는 것이자, 타자가 규정한 욕망을 우리 안에 내재화하는 것이다(당신은 태어날 때부터 샤넬 백을 원한 게 아니었지 않은가). 우리의 시각은 늘 우리의 의식이 향하는 곳에 초점을 맞춘다. 사실 그러한 의식 또한 상징질서에 물들어 있는 하나의 지향성일 뿐이다. 이렇게 우리의 익숙한 시선에서는 매순간 가시적이지만 보지 못하는 것들이 떨어져나간다. 이 지향성의 시선, 의미망의 포획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우리는 불확실성 속으로 우리의 감각을 떠돌게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즉 욕망이 아닌 주이상스, ‘실재’와 조우하는 즐거움을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은 이러한 왜곡된 응시, 탈구(脫臼)적 실행에만 열려 있다.

 

텅 빔

왜곡된 응시에서 줄곧 우리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사물들의 또렷한 질감이나 형태가 아니라 오히려 테두리의 생략, 텅 빈 구멍이다. 서양배의 광택이 텅 빈 구멍으로 뚫려버린 곳에서(<Hole>), 찻숟가락의 섬세한 디테일에 맞서 사라져버린 찻잔의 테두리에서(<For Two>), 나뭇잎과 잔디의 결이 바람처럼 날아가 버리는 저 소멸의 찰나에서(<Garden in Brockley>) 우리는 시선을 멈춘다. <분필>에서 노란 모과색의 연장이 주는 속도감과 운동감이 경쾌함을 안겨주는 한편, 쉽게 눈길을 떼지 못하는 지점 또한 저 작은 얼룩, 다름 아닌 모과의 썩어가는 부위다. 빛이 와 닿는 축복의 접지들, 살아있음의 현실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들이 소멸과 부재로 간단없이 넘어가버린다. 우리는 가장 빛나는 찰나와 죽음의 동일성을 목도한다. 세계의 창조는 빛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빛이 있으라.” 이것이 창조의 출발점이다. 작가의 빗나간 응시는 이 빛을 무(無)로 읽어낸다. 신지학에 몰두해 회화의 영도(zero degree)를 추구했던 말레비치나 중세 카발라 신비주의자들의 신념처럼 우리는 어쩌면 이 ‘텅 비어있음’, ‘무’를 경유해야만 실재에 가닿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