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와 표면
 
서한겸

 

고지도의 부분인가. 크거나 가는 색의 파편들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얼핏 무언가가 반짝인다. 다가가 자세히 보니 색과 질감이 다른 여러 층이 긁히고 벗겨진 듯 드러나 있다. 푸른 층은 호수 같고 녹색을 띤 흰 층은 산, 반짝이거나 검은 층은 광맥인가. 항공사진인가? 혹은 미시세계인가 싶기도 하다. 궁금증을 가지고 걸음을 옮기면 바닥에 놓인 둥근 덩어리들이 보인다. 그 표면을 가득 덮은 씨앗은 날을 세운 채 말라 있지만 흙을 만나면 잎이 자라나올 것이다. 오래된 모습으로 미래와 연결되어 있다.

영상 속의 손은 분주하다. 달걀노른자에서 흰자를 닦아내고 그 막을 찔러 노른자만 따라낸다. 무언가를 갈고 섞고 개고 불리고 끓인다. 그렇게 바르고, 갉고 긁어냈다는 색의 층들. 까다롭고 복잡해 보이는 이 과정은 모든 동식물이 땅 위에 쉼 없이 하고 있는 일들의 비유다. 지표면은 지층 위에 생명체의 흔적이 합쳐져 만들어진 결과다. 나무뿌리가 땅을 열고 개미가 굴을 파고 때로는 지진이 나고 물줄기는 길을 낸다. 부분 부분 드러난 색의 층은 옛날에 바다였다가 공기 중에 드러난 황망한 지층과도 같다. 중력에 의한 쌓임과 마찰력에 의한 닳음, 두 원칙에 의해 시간을 타고 변화해온 두 표면은 서로 닮았다.

알록달록한 돌, 색색의 안료와 섬세한 도구는 지질학자나 화학자의 실험실을 떠올린다. 먼 곳에서 나고 자란 동식물과 광물이 연금술을 닮은 단계를 거쳐 색이 되어 한 화면에서 만난다. 색이 된 물질의 시간들이 덮이고 드러나면서 하나의 표면을 만든다.

작가에게 물적 토대와 재료는 중요한 요소다. <반>(2019)의 두 화면은 같은 순서로 퇴적되기 시작했으나 어느 시점부터 각자의 길을 가 지금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색의 층들이 쌓인 것은 바꿀 수 없는 과거다. 덮여 있으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알 수 없고, 알 수 없으면 없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들은 그 시간에 있었고, 지금도 거기에 있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일을 겪으면서, 다르게 삶으로서 여기에 닿고 저기를 긁히며 어떤 층은 숨겨진 동안 어떤 층을 드러내며 지금의 모습을 만든다.

플레이스홀더placeholder는 빠져 있는 다른 것을 대신하는 기호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하나의 색을 가진 하나의 면이 마치 지층처럼 그것이 만들어지던 시간을 대변한다. 색면을 쌓는 일은 안료와 재료의 물성을 따르는 겸허한 행위이나 거기에는 그것이 발리던 순간의 감각과 분위기가 담긴다.

작가는 표면의 색이 전체를 보는 데 영향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위에 흰색을 얹었다. 그래도 투명한 템페라는 밑의 색들을 어렴풋하게나마 보여준다. 색의 층들을 긁고 파내려 가는 일은 과거에 이루어진 것들을 발굴해 냄으로써 현재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표면의 효과를 위해 존재하던 층들을 드러내고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다. 쌓기와 지우기, 과거와 현재가 섞여 하나의 겉을 만든다.

표면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덮여 있지만 언뜻언뜻 드러나는, 보이지는 않지만 존재감이 뚜렷한, 지나간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상대의 깊이와 양감과 무게를 알고 있지만 오직 겉에만 닿을 수 있는 빛, 시선, 진동, 반사, 관계에 대한 반응이다.

안타까운가. 한숨이 나는가. 드러난 곳만 만질 수 있고 가장 바깥만 보고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하지만 우리는 일만 개의 특성을 지닌 대상의 어느 한 부분만 깊이 알아도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수많은 시간을 담은 층을 드러내는 것은 감춰진 것을 보고 싶은 욕구다. 나의 깊이를 꺼내주길 바라는 기대다. 그리고 지금 우리의 모습은 그 시간들의 결과라는 말. 드러난 것, 닳은 것, 투명한 것을 통해 지나간 감정과 사람과 기억이 잠깐씩 비칠 때. 결코 다 알 수 없고 다 볼 수 없지만. 얼굴 안에 밑에 너머에 내가 두려워할 것과 찾고 싶은 것과 사랑할 것과 해로운 것과 보석 같은 것과 말하고 싶은 것과 알고 싶지 않은 것과 삶의 이유가 될 무언가와 반짝이는 것들이 있음을 내가 안다.

표면은 이제 마구 움직인다. 덧칠할 수 있는지, 작게 반짝이는 층을 더 드러낼 수 있는지, 그러려면 다른 층을 파헤치게 될 것인지, 드러나지 않은 층은 어떤 색과 질감인지, 네가 기뻐할 것인지, 그냥 두고 싶은지, 많은 것이 궁금해진다.